김씨표류기 ( 2009 / 이해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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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다.. 혹은 버리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도입부가 떠오른다.
"삶은 곧 선택이다. 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TV/냉장고를 선택하고..."

선택에는 돈이 필요하다. 돈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돈이 많을수록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반면 돈이 적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좁다. 냉정한 사회는 선택의 폭이 좁은 '돈 없는 자들'을 냉대한다. 돈 없는 자들은 쉽게 버려진다.

남자 김씨는 버림받았다. 돈이 없어 버림받고 직장, 애인도 그를 버렸다. 결국 그도 스스로 그를 버렸다. '선택할 능력이 없으면 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 사회의 당연하면서도 냉혹한 원리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편리한 이론은 될지언정 영원한 진리는 결코 아니다. 밤섬은 그런 사회의 냉정한 이론을 부정하는 공간이 된다. 돈이 없어 버림받은 김씨는 돈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물에 빠져, 목을 메어 죽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문득 깨닫는다. 주저앉아 X 를 싸며 얻는 쾌감, 사루비아 꽃을 빨며 느끼는 달콤함, 그리고 밀려오는 추억에 격해진 감정... 이것이 삶의 희망이라는 것을.. 이제 스스로를 버리려던 그는 결국 희망을 등진 세상을 버린다.



| HELP or HELLO

불가(佛家)에서 중생들의 고뇌는 곧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부자가 되고픈 욕망, 사랑을 받고픈 욕망, 오래 살고자하는 욕망...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집착이 된다. 하지만 오래된 집착은 쾌락이 되기도 한다. 마치 숨이 넘어갈 듯한 마라톤 선수가 고통이 아닌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여자 김씨는 스스로를 가두었다. 관심받기 위해 십수인치의 컴퓨터 모니터 속에 자신만의 유리성을 만들고 그곳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타인의 관심'은 자존심을 북돋아준다. 하지만 진정한 자존심은 타인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얻는 것이다. 그래서 自尊心(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다. 사회로부터 관심받고자 하는 김씨는 방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가족과의 대화도 없이, 타인의 사진과 키보드위의 웃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자기계발에 매진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둔 채... 그녀는 스스로를 존경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살아움직이는 것들과 단절한 채, 스스로 고립되고자 했다. 그런데 멈추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버려진 섬에서 외계인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HELP. 그녀는 처음 살아있는 것에게 관심을 보인다. HELLO.

| 삶이 편리해집니다.

태초에 인간에게는 생존의 욕구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입고 먹고 자는 것만이 지상최대의 목표였던 시절, 그들에게는 주민등록증도, 플래티늄 카드도, 거추장 스러운 양복도 필요없었을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기 위해 주민등록을 하고, 편리한 소비생활을 위해 신용카드를 발급하고, 직장생활을 위해 양복을 입지만 밤섬에 사는 아무 것도 쓸모가 없다. 사회를 버린 김씨는 이제 생존의 욕구만이 최대의 목표이다. 주민증은 의미가 없다. 카드 따위도 필요없다. 양복은 벗어던진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자. 독버섯이면 어떠리.. 일단 배를 채우자. 새가 먹고 죽은 생선이든, 그 생선을 먹고 죽은 새든 내 배가 부르면 그만이다. 목적이 단순해지니 삶이 편리해진다. 이것저것 잴 필요도 없다. 빨래세제로 머리를 감든, 오리배를 집으로 삼든, 솔방울로 골프를 치든, 컵 뚜껑으로 선그라스를 만들어 쓰든 내 맘에 들면 장땡이다.  험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생겨난 부담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예쁜 얼굴, 명품 구두는 어쩌면 나에게 필요하다기 보단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뿐인지도 모른다. 예쁘고 제일 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것들에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는데서 만족을 찾는 것은 속이 빈 깡통처럼 한계가 있다. 방에 갇힌 김씨의 미니홈피에는 수십장의 화려한 사진들이 올라와있지만 정작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얼굴은 창백하며, 옷은 볼품없고, 방은 너저분하다. 하지만 버려진 섬의 그녀만의 외계인에게는 예쁜 얼굴도, 명품구두도 필요가 없다. 그저 하얀 종이위에 쓰여진 진심어린 얘기만이 그녀를 표현한다. 누구에게도,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How are you ? Fine, thank you. 라는 말이 그녀와 세상을 이어줄 진짜 관심, 진심인 것이다.

| 12g 의 유혹

욕망. 그것은 고통의 시작임을 안다. 김씨에겐 강물에 떠밀려온 고작 12g일 뿐인 짜장스프가 고통의 시작이었다. 정백당. 덱스트린, 캬라멜, 향미증진제 따위의 혼합물이 한순간 김씨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짜장의 면을 만들기 위해 온갖 자생식물을 다 빻아보고 결국은 '주라기 공원을 만든 호박속의 모기'와 맞먹을 만큼의 커다란 발명, 새똥에서 밀씨 찾기가 시작된다. 버려졌던 물건들도 다시 사용한다. 새똥을 벗겨내는데 플래티늄카드를 쓰고, 양복과 케챱통은 허수아비가 되며, 빈 생수병은 슬리퍼가 된다. 삶이 또다른 방식으로 신불자 김씨를 진화하게 한 것이다. 김씨는 말한다. "욕망이 사람을 똑똑하게 만든다"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소금, 제일 가는 향수

주변에는 편리한 물건들이 참 많다. 음식을 보관해주는 냉장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휴대전화까지...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을 단순하게 한다. 피자나 빵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치즈와 밀가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먹고 싶으면 사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밤섬에는 아무것도 없다. 필요하면 석달이 걸리든 넉달이 걸리든 직접 만들어내야 한다. 짜장스프의 유혹에 못이겨 만들어진 스프만 홀랑 먹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짜장이 먹고 싶어질 때.. 그때는 다시 이미 만들어진 짜장스프를 찾아 주으러다닐건가? 여기서 김씨는 스스로 면을 만들 생각을 한다. 'Ready-made 스프'가 아닌 'Do it myself' 짜장면을 택한 것이다. 스스로 살아가려면 '낚아놓은 물고기' 대신 '물고기 낚는 법'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땀흘리며 '진짜 짠맛'을 느끼고 그 짠맛을 가장 비싼 향수를 담던 병에 담는다. 역시 "진화는 맛있어지는 과정이다"

그는 그녀가 보내준 중국집 짜장면도 돌려보낸다. 불어터진 Ready-made는 그것이 간짜장이든 삼선짜장이든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겐 직접 만든 따뜻한 짜장면만이 진정한 희망이니까. ( 단! 나무젓가락이랑 단무지는 빼고.. ) 지금껏 172kcal 의 통조림 옥수수와 525kcal 의 생라면만 먹던 그녀도 그가 돌려받은 불어터진 짜장면을 통해 희망의 맛을 느낀다. 비록 불어터진 짜장면이지만 이제 짜장면은 두 김씨에게로 이어져 두 개의 희망이 된다... Congraturations... 진.짜.루.


| 죽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자살하는 사람(소통을 거부한 사람도 어찌보면 사회적 자살이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전혀 그들을 이해 못하겠다가도 가끔 그들의 마음에 수긍이 갈 때가 있다. 세상이 그를 버렸으니, 그들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버린다는데 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내 생각은 제 자리로 돌아온다. 

'자살은 약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봐라.'

하지만 자살을 결심한 이들에게 '그 용기로 살아보라'는 말은 그들에겐 오히려 비난일 수도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Rule 속에서는 살아갈 용기는 커녕 이미 삶의 의욕조차도 상실한 상태일테니까... 밤섬에서 당당하게 살던 김씨가 '생태보호구역'이라는 사회적 Rule 에 의해 밤섬에서 쫒겨나 다시 서울 도심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받게 되자 그는 또다시 죽음을 결심하고 63빌딩을 향하는 것처럼 말이다. 방에 갇힌 김씨 또한 자신을 다시 가두려고 한다. 애써 진심으로 다가가려던 마음이 멈칫한 순간 다시 마음의 문이 닫히고, 그녀가 관심받고자 했던, 그리고 그녀에게 관심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새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Rule'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획일화된 잣대속에 우겨넣으려고 하는 억압일지도 모른다. 그 억압을 못견디는 이들이 선택하는 가장 극한의 일탈이 자살일 것이다. 그래서 두 김씨도 자살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기회를 얻는다. 여자 김씨가 일년에 두번 도시가 멈추는 시간동안 남자 김씨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다가간 것이다. 예비군 싸이렌이 울려 잠시 도시가 멈추는 시간은 그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사회적 Rule 이 잠시 무력화되는 시간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1년 365일이 항상 희망일 수는 없지만, 가끔 한 두번 정도는 그래도 희망된 때가 있으니 그때를 기회삼으라며 용기를 주고자 하는 의미일 것이다. 비참하게 죽는 것보다는 힘내서 살아보는게 그래도 낫지 않느냐는 희망의 메세지일 것이다. 죽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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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2009) / 봉준호 감독

| 엄마가 아들에게 쓰워주는 멍에
 
도준은 흔히 말하는 바보, 혹은 반푼이다. 하지만 그런 도준도 엄마에게는 늘 소중한 보석같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도준에게 누가 바보라고 부르거든 상대방에게 꼭 복수하라고 신신당부한다. 그것은 도준의 자존심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엄마 자신의 자존심을 위한 말이다. 제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 '반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늘 강조한다. '맑은 사슴같은 눈을 가진 아이'라고... 세상에서 좋다는 음식, 약, 침은 다 해준다. 너는 내 자식이니까... 하지만 엄마의 그 행동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벗어나고픈 굴레가 되기도 한다. 매일 먹는 약은 남기기 일쑤, 맛있는 반찬을 줘도 시큰둥. 하지만 '나도 이제 다 할 수 있거든요?' 라는 주장도 어미에겐 귀여운 투정일 뿐이다. 그래서 엄마는 더욱 아들에게 집착한다. 한순간도 아들에게서 신경을 떼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도 손님을 맞으면서도, 하물며 당신의 화제는 온통 아들 '도준'에 대한 것 뿐이다. 하지만 그럴 수록 도준은 '바보'가 된다. 자립하지 못하고 늘 엄마의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존재. 그래서 세상은 그런 도준을 '바보'라고 놀리고, 늘 얌전하던 도준도 '바보'라는 말에는 끝내 폭발하고 만다.

| 아들이 엄마에게 얹어주는 짐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었다. 부잣집 마나님은 아니어도 나이 들면 자식새끼의 재롱을 보며, 보살핌을 받으며 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친구랍시고 동네 양아치 녀석의 꼬봉노릇이나 하며 매일 바보라고 놀림받는 아들때문에 엄마는 오늘도 입이 마른다. 얼굴에는 핏기하나 없다. 그래서 아들 도준은 때로는 엄마에겐 두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다. 모자란 아들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도 짐이고, 그 아들의 운명이 고스란히 당신의 몫이 된다는 것도 짐이다. 그래서 한때 엄마는 아들과 같이 죽어버리려고도 했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게도 이 고난의 길을 벗어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이제 남겨진 것은 아들의 세상살이를 위해 함께 헤쳐나가야할 고난의 삶. 이골이 날 정도로 지내온 그 삶을 엄마는 오늘도 이어간다.

| 내 자식만이 '善'이다

엄마는 처음부터 도준의 범죄사실을 믿지 않는다. 착하디 착하고 순하디 순한 나의 어린 양이 그런 사고를 저지를 리가 없다. 누명을 쓴 것은 모두 나쁜 친구를 곁에 두었기 때문이고,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은 내 자식이 아닌 '누군가'일거라고 광분한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엄마의 모든 능력이 총동원된다. 돈, 인맥, 야매 침술 등 지금껏 살아온 모든 그녀의 삶이 온통 아들에게로 집중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엄마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친구의 집에 침입하거나, 립스틱 묻은 골프채를 피묻은 증거품이랍시고 들고 나오거나, 생판 처음보는 고등학생들을 폭행할 것을 사주하거나, 심지어는 잔인한 살인까지 저지르는 등 남들이 봐서는 이해하지 못할 수준으로 점점 폭주해 갈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내 자식만이 善'일 것이라는 맹목적인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내 자식은 무조건 옳을 것이므로 다른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아들을 자기자신과 동일시하는 대다수의 어머니들에 대한 은유이다.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기에, 내 자식은 나의 분신이기에, 자식이 잘못되는 것은 결코 볼 수가 없기에 내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들의 무모한 사랑에 대한 경고이다.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행동이 자칫 다른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도준의 의도하지 않은 살인은 어머니의 말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보'라는 말에는 가차없이 응징할 것을 가르친 엄마. 아들의 '말'이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살인의 피해자인 고교생 소녀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소녀가장이며, '쌀떡'이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생계를 위해서 원조교제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인간이었다. 도준이 생각없이 내뱉은 '남자가 싫으냐?'는 물음이 그녀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울분으로 터져나왔고 그로 인해 그녀 내뱉은 '바보새끼'라는 외침이 도준의 '응징'회로를 엉뚱하게 자극해 버린 것이다.

| 자식은 엄마앞에서는 늘 바보다.

영화에서 원빈은 '바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의 '바보'는 사전적 의미의 '바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인물설정은 차라리 '자식은 부모앞에서는 늘 바보가 된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엄마의 개입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보호가 많아질수록 그 앞에 자식은 점점 제 역할을 잃어가는 것이다. 도준은 감옥에 갖혀있고 그를 구명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엄마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간헐적인 그의 기억만이 엄마에게 채택될 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원빈의 분량이 줄어들고 김혜자의 분량이 전체를 압도하는 것도 이런 내용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표면적으로 엄마는 아들이 바보인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설정되면서도, 그런 엄마조차도 아들을 온전하게 신뢰하지는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아들의 하는 행동 모든 것이 못미덥기에 행동 하나 기억 하나까지 조정하려고 하는 엄마로 설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알고 있다. 다섯살 때 엄마가 자신에게 농약을 먹이고 동반자살하려 했던 일. 그래서 아들은 엄마에게도 어느정도의 적개심을 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엄마에 대한 분노이다. 하지만 이런 자식의 현재 삶은 당신으로 인한 결과이다. 당신이 자식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므로 아들은 바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그래도 엄마는 자식을 사랑한다.

영화의 마지막.. 다른 바보가 엉뚱하게 살인사건의 누명을 쓰고 도준은 석방된다. 굳이 누명쓴 진범을 만나야겠다고 고집한 엄마. 갇힌 진범의 얼굴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미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기에, 자기 아들의 안위를 위해 남의 집 자식에 누명을 씌울 수 밖에 없는 죄를 그녀는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불에 타버린 고물상에서 엄마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이걸 흘리고 다니면 어떡해?'라고 되묻는 도준의 행동은 엄마를 또 다시 놀라게 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허벅지에 침을 놓는다. '가슴이 답답하고 뭐가 꽉막힌 것처럼 쌓여있을 때 싹 쓸어내려주는 침자리'를 찾아 스스로 자기몸에 침을 놓는다. 다른 집 자식을 옥에 가두었고, 자기 자식에 대한 두려움도 깨달았지만 그래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포기할 수 없기에 모든 걸 있고 다시 아들만을 사랑하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은.. 무섭고도 슬프다. 세상 모든 엄마의 당연한 운명, 그운명속에 도사린 잔인한 속성 때문이다. 가정의 달 5월인데.. 가정이 무서워지는건 왜일까..?

| 남겨진 이야기

1. 왜 영화제목이 '엄마'가 아니라 '마더'일까..?
   '엄마'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 라고 생각함.

2. 반전이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심리를 집요하게 쫒아가는 심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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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시리즈는 1984년 개봉한 첫편부터 수많은 영화적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냈다.
그 첫번째가 기계인간의 등장, 두번째는 기계와 인간의 대결, 세번째는 미래가 개입하면서 달라지는 과거인데, 이 영화는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이 이야기들을 스스로 복제하고 변형하면서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였다.

첫번째는 기계인간의 등장.
 
1탄에서 터미네이터는 근육질의 로봇이었고, 2탄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변형가능한 액체금속이었으며, 3탄에서는 보다 진보한 액체금속이었다. 이번에 개봉된 시리즈의 시간적 위치는 말하자면 1탄의 미래가 도래하기 전의 시점이다. 따라서 등장하는 기계들 역시 T-800 이전의 투박한 형태의 기계전사들이 대다수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계사단의 로봇들이 다른 SF 영화에서 등장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매우 낯익은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전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등장했던 기계들 빼고...)

위로부터 영화 속의 하이드로봇 / 모터터미네이터 / 하베스트

하이드로봇은 스파이더맨2의 '옥토푸스' / 모터터미네이터는 베트맨 다크나이트의 '베트바이크' / 하베스터는 트랜스포머의 로봇들과 형태와 동작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특히 모터터미네이터는 배트카에서 분리되던 배트바이크처럼 하베스트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감독이 의도적으로 역대 SF 영화로부터 독특한 형태의 로봇들을 죄다 끌어모아 놓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한편 T-800 은 이번 시리즈에서 최신형 터미네이터(!)로 등장하는데 그 얼굴은 당연하게도 아놀드 슈왈제네거로 등장한다. (영화속에서 아놀드의 얼굴이 등장하는 순간 정말 반가웠다... 그가 존 코너를 죽이려하는데도 불구하고... - -;;)

두번째는 기계와 인간의 대결.
 
1탄의 터미네이터는 프레스에 눌려 제거되었고, 2탄에서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용해되었으며, 3탄에서는 핵연료전지의 폭발로 인해 사라졌다. 4탄의 배경은 2018년, 이미 인간과 기계들의 전쟁이 시작되어 수많은 전투가 펼쳐지고 있고 대체로 기계들은 총격과 폭발에 의해 파괴된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에 등장하는 수많은 전투장면들은 파괴와 제거를 단순하게 반복하는 과정만은 아니다. TERMINATOR : SALVATION 을 유심히 지켜보면 전작들에서 스쳐보여주었던 아래와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에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 TERMINATOR 1 ]
T-800 첫 등장

총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

살고 싶으면 날 따라와요.

미래에서 온 존 코너의 아버지 / 카일 리스

일어나라. 병사!!

이 테입을 듣게 되는 날이 올꺼야.

[TERMINATOR 2]
존 코너의 얼굴에는 언제 상처가 생겼을까?

얼렸다가

녹였다가..

가슴에 내리 꽂은 비수

그래도 다시 살아난다.

너만은 살아야 한다.

엄마!!

우리편 흉내내기

스위치는 내가 맡는다.

[TERMINATOR 3]

존 코너의 아내 / 캐서린 브루스터

세번째는 미래가 개입하면서 달라지는 과거.

1탄에서는 미래의 카일 리스가 과거로 와서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었고, 2탄에서는 싸이버다인을 폭파함으로서 심판의 날을 늦추었으며, 3탄에서는 T-X가 등장하여 스카이넷이 폭주하도록 해킹한다.  4탄에서 존 코너는 아직 인류구원의 열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엔 존 코너가 모르는 또 하나의 미래가 있었다. TERMINATOR : SALVATION 은 시간을 잠시 2003년으로 되돌려, 마커스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싸이버 다인'에 시신기증을 서약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사나이의 이야기는 사라 코너도 존 코너도 알지 못하도록 미래가 새로이 개입한 과거이다. 그는 이번 시리즈에서 인간형태의 기계, 즉 터미네이터의 프로토타입(원형)으로 등장하는데 혹자는 '주인공인 존 코너가 마커스에게 밀렸다'고 평할 정도로 이 영화는 그에게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커스라는 사나이가 처음엔 자신이 기계화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로보캅'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기계인간의 비극적 운명 스토리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그의 운명은 원형과 그닥 다르지 않다.

로보캅 ( ROBO Cop / 1987 / 폴 버호벤 감독 )

사립경찰인 OCP에 소속된  '머피'는 범죄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OCP는 그의 신체를 기계장치와 융합하여 로봇경찰로 재탄생시킨다.

마커스는 TERMINATOR : SALVATION 에서 존 코너를 도와 기계사단의 기지를 파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는 원래 기계사단에서 존 코너를 유인하기 위해 만든 미끼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그 사실을 기계사단의 심장부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는데, 이 장면은 '토탈리콜'에서 자신을 레지스탕스로 알던 주인공이 실은 자기도 모르게 레지스탕스 지도자를 적에게 데려다주는 역할한다는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본따고 있다.

토탈리콜 ( Total Recall / 1990 / 폴 버호벤 감독 )

화성이 지구의 식민지가 된 미래, 평범한 시민인 '퀘이드'는
기억조작(Total Recall)을 이용해 화성여행을 하려다
자신의 뇌속에 이미 조작되어있던 기억이 돌아오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원래 화성의 독재적 행정책임자 '코하겐'의 오른팔인 '하우저'였다.

여기서 캐스팅의 재미가 드러나는데 '토탈리콜'의 주연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터미네이터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코하겐의 또 다른 부하이자 로보캅에서 '머피'를 죽인 범죄집단의 보스로 등장한 '마이클 아이언사이드' TERMINATOR SALVATION 에서 저항군 사령관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아이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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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이번 시리즈는 터미네이터 1탄 이후 등장한 여러 SF 영화들 (자신의 시리즈까지 포함하여) 로부터 새롭게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4편에서 보여주는 많은 장면들이 전작들에 나타난 사건들에 대해 그 원형으로서의 미래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작진은 새로운 인물인 마커스를 등장시켜서 인간과 기계간의 긍정적 관계에 대한 희망의 가능성까지 남겨두고 있다. 터미네이터 3가 개봉한 후 많은 사람들이 터미네이터도 이제 더 이상 이야기거리가 없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현했고 터미네이터 4에 대해서도 액션만 화려했지 새로울 것이 없다는 평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이번 시리즈는 그렇게 쉽게 치부해버릴 수 있는 에페소드는 아니었다. 터미네이터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스타워즈만큼이나 확장된 이야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첫 시리즈부터 그랬듯이 미래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바뀔 수 있음을 강조하고, 미래를 뒤틀 수 있는 수단으로 과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존 코너가 살고 있는 2018년에는 아직 T-1000 도 T-X 도 등장하지 않았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지만 과거로 인해 바뀔 수 있고, 그로인해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미래는 새롭게 시작을 맞이했다. 1편의 충격과 2편의 감동, 3편의 숨고르기를 통해 등장한 이번 4편을 보고 나니. 이번 시리즈가 다음 편의 충실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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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술 (2008 / 감독 노영석)

'워낭소리 / 똥파리'에 묻혀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입니다.
이미 몇몇 영화제에서 수상도 했구요.

내용 자체가 스포일러라 밝히진 않겠습니다만
검색해보면 나옵니다. ^^

제가 이 영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영화를 찍기 위해서 큰 자본과 많은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촬영은 6mm DV 로 했고, 조명은 사용하지 않았고, 로케이션도 게릴라식으로 찍었다지요.
더구나 배우는 스탭일도 겸하면서..

덕분에 화면에는 Noise 가 가득, 야간화면은 잘 보이지도 않고, 배경은 늘상 강가,도로 등등..
엔딩크레딧에는 몇명 등장하지도 않아요. ㅋㅋ;

하지만 중요한 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거.

상업영화에서 미려한 화면과 세련된 음악 등은
관객을 사로잡는 큰 부분이 되었죠.
하지만 외양만 화려하고 속은 빈 영화가 어디 한둘인가요 ?

한번씩 꼭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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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 (2007/감독 임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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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선생, 1998,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

"의사의 생명은 발이다. 발을 다치면 손으로라도 달려서 환자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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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감독 정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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